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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새로운 시작을 할수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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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3:39 일상의 한켠에서

융의 유형론에 따르면 SJ는 다시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ISFJ, ESFJ, ISTJ, ESTJ가 그들이다. 이러한 네 가지 유형들은 서로 상이한 만큼이나 서로 유사하기도 한데, 특히 의무를 몹시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에피메테우스적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적 단위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프로메테우스와 아틀라스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는 디오니시우스가 SP형의 상징인 것과 마찬가지로 SJ형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 보다 잘 알려진 에피메테우스의 형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신화에 삽입된 바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아버지인 제우스가 주는 어떠한 선물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자신이 했던 충고에 따라 제우스가 그를 위해 만들어낸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제우스가 판도라를 에피메테우스에게 주려고 하자 에피메테우스는 형을 본받아 마찬가지로 거절을 했다. 그러자 제우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노발대발하게 되었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에 놀란 에피메테우스는 비록 이 선물, 이제까지 창조되었던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에 따르는 위험을 충분히 알고는 있었지만, 서둘러 자기가 내렸던 결정을 재고하여 판도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판도라는 곧 호기심에 굴복하여 올림푸스에서 자기가 가져오기는 했으나, 제우스로부터 열어보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은 금으로 된 상자를 열었다. 에피메테우스는 그의 아내가 금지된 상자의 뚜껑을 들어올리고 난 후에조차 그녀를 말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악이 인류에게로 쏟아져 나오도록 내버려두었다. 노년, 노고, 질병, 어리석음, 악덕 그리고 열정 등이 쏟아져 나왔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와 함께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훌륭한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이제는 온 세상에 퍼진 이러한 재앙들에 대항하는 방패로서 그를 안내해 줄 "해야하는 것"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에피메테우스가 판도라와 결혼하라는 제우스의 요구에 응했을 때, 그는 처세하는 지혜를 얻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여론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데 대한 지식을 얻은 것이다. 이와 같이 순종함으로써 에피메테우스는 양심에 관한 자기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인류의 모든 악을 경험했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판도라의 상자에 있었던 악 가운데 단 하나의 선인, 희망(과 예언)이라는 보물을 가지게 되었다. (Grand, 1962, Graves, 1955; Hamilton, 1940; Jung, 1923.)

그러므로 SJ는 소속되어야만 하며, 이렇게 소속되는 것은 노력하여 얻어지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는 의존하는 것이 마치 신에게서 받은 권리라도 되는 듯이 베푸는 사람에게 억지로 의존하려 드는 공짜 손님은 아니다. SJ에게 있어서 의존이란 정당한 상황이 아니며 또한 그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SJ에게는 의존하는 것이 의무를 게을리 하거나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죄의식을 가져다준다. 더욱이 그는 주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고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며,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지 돌봄을 당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에 SJ에게서 볼 수 있는 거의 어버이다운 태도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인생의 초기에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령 편성된 지 얼마 안된 유치원은 한 학급을 들여다본다고 하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12명 가량의 다섯 살 짜리 아이들이 자기들이 "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얘기해줄 만한 단서를 진지하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찾아내려 하는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소수의 NF나 NT들을 제외하면 대개는 SP들인데)은 마치 강아지처럼 서로 싸우고, 킁킁거리며, 물어뜯는 등 몇 시간이고 계속 행복하게 지낸다. 학교는 SJ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대체로 SJ들에 의해 운영되며, 주로 이 까불어대는 강아지들을 오직 그들이 무엇을 "하기로 되어 있는지" 알려고만 하는 심각하고 의무 지향적인 꼬마 부모들로 바꾸어 놓기 위해 유지되고 있다.


SJ가 학교에 다니게 될 즈음이면 그의 태도는 이미 형제처럼 우애 있는 태도에서 부모처럼 보호하는 태도로 바뀌어진다. 물론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어린 시절 내내 그가 신문배달을 하게 되거나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수입원을 가지게 될 때까지 의존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한 상태를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SP의 경우에서처럼) 독립에 대한 욕구 때문만이 아니며, 그 보다는 봉사하고자 하는 충족되지 못한 욕구 때문인데, SJ는 마치 무엇인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SP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지 않을 수 없는 반면, SJ는 요컨대 속박되고, 의무를 짊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해보자. 이러한 것들을 상반되는 욕구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실제로 SJ의 특성은 SP 특성과의 상반성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잘 설명될 수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첫째로, SJ는 스토아학파적인 윤리에 따라 사는 반면에, SP는 에피쿠로스학파적인 윤리에 따라 산다 - 놀이의 윤리에 비하여 일의 윤리인 셈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다 윤리라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어느 한 가지가 좋고, 어느 한가지가 나쁜 것이 아니며, 그 두 가지는 단지 선에 대한 관점을 달리할 뿐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NF의 윤리와 NT의 윤리에 있어서의 이들과는 또 다른 관점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SP는 평등에 대한 신념과 욕구로서 그의 우애적이고 자유론자적인 견해를 뒷받침하는 반면, SJ는 위계질서에 대한 신념과 욕구로써 그의 어버이답고 책임을 지려는 목적을 뒷받침한다.

SJ에게 있어서 어떤 사회의 위계적인 구조는 그 사회의 본질에 해당된다. 상위에 속하는 것이 있어야 하며, 하위에 속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도시, 학교, 교회나 회사에는 물론 가족에도 구성원간의 상호작용을 지배할 규칙이 있어야한다. 또한 그와 같은 사회적 단위 내에서의 각자의 지위는 노력하여 얻어지는 것이어야만 한다 - 각자는 자기의 본분을 다해야만 한다. SP는 그러한 견해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각자가 속한 사회적 단위가 무엇이든 지간에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평등하며, 어떠한 수준의 지위이든 간에 그것은 운에 달린 것이지 노력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규칙은 어떠한가? 글세, 그것은 단지 우연히 차지하게 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된 수단쯤일 뿐이라고 SP에게는 생각될 것이다.


철두철미한 SJ인 사람을 아주 잠깐만 살펴보아도, SP의 낙관주의와는 상반되게 그의 모든 행동에 걸쳐 드러나는 비관주의라는 주제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보이스카웃의 좌우명인 '늘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말은 철저한 SJ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으며, 보이스카웃을 만들어낸 사람도 SJ이고 전국의 보이스카웃 그룹을 지배하는 사람도 SJ일 것이 틀림없다.

정말이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SJ는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 그의 행동 중의 많은 것들이 그러한 장애들과 꼭 일어나게 마련인 불리한 사건들을 위한 준비인 것이다. 우리가 SJ는 불행과 재난을 비관적으로 예측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불행과 재난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보아야한다 그들에게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저축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이솝의 "개미와 베짱이"는 SJ와 SP의 상반적인 관계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그 우화를 보면, 개미는 부지런히 그리고 충실하게 커다란 빵 부스러기를 땅위에서 창고로 나르고 있는 반면에, 베짱이는 개미가 지나다니는 길가 풀잎 위에 걸터앉아 바이올린을 켜고, 담배를 피우며, "세상은 나를 먹여 살릴 의무가 있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개미는 여전히 수고로운 작업을 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다가오는 겨울철에 대비하지 않고 있다고 베짱이를 꾸짖는다. "나랑 같이 일해요." 하며 개미가 재촉하기를 "그래서 우리가 함께 창고를 채우게 되면, 당신이나 나나 추위와 굶주림을 겪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잖아요." 베짱이는 대답하기를,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처럼 열심히 일을 계속한다면 당신은 겨울이 오기 전에 궤양이나, 고혈압이나 대장염으로 쓰러지게 될 거요. 나처럼 풀잎 위로 올라와서 후끈후끈한 여름과 풍성한 먹을 것들을 같이 즐깁시다.

그리고는 세상이 우리에게 진 빚을 노래로 세상에 알립시다." 물론 개미와 베짱이는 상대방의 요청을 무시하고는 자기 나름대로의 즐거운, 혹은 지루한 일을 계속한다. 그러다가 길고, 춥고, 배고픈 겨울이 오자, 베짱이는 서리를 맞고, 굶주린 몸으로 개미네 집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고, 맛있는 음식들을 가득 저장한 창고에서 안락하게 지내던 개미는 베짱이를 맞아들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SJ들과 SP들간에는 상당히 빈번하게 결혼이 이루어져서 이와 같은 영원한 드라마가 되풀이된다.


에피메테우스적인 비관주의와 관련된 그 다음의 특징으로는 머피의 법칙에서 말하는바 "잘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은 결국 잘되지 않는다."거나 "일은 언제나 예상보다 더 시간이 걸리고, 더 힘이 든다."는 생각이다. 오직 SJ만이 그러한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다. 쓸모 있고자 하는 SJ의 욕구는 종종 어느 곳에든 소속되고자 하는 갈망으로 나타난다.

이점에서 SJ는 다른 어떤 유형의 사람들보다 더 큰 욕구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 단위에 속한다는 것은 그의 행동유형의 중심을 이룬다. SJ는 그의 행동에 의해서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가족, 교회, 봉사클럽, 지방자치단체, 회사 등과 같은 사회적 단위의 연속성을 만들어내고 또 육성시킨다.

SJ에게 있어서 사회적 단위는 마치 SP에게 있어서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듯이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나 SP가 사회적 단위에 가입한다면, 그는 자기가 회원이 된 대가로 그 사회적 단위가 자기에게 봉사하고 자기의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할 것이다.


SJ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전통은 점점 더 중요성을 갖게 된다. 전통에 관한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서 가족, 클럽, 교회 혹은 회사에서 SJ인 사람들을 찾아보자. 만일 전통적인 의식이나 축하행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철저한 SJ는 머지않아 그러한 것들을 몇 가지 만들어내서 유지시킬 것이다.

말이 난 김에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러한 축제나 의식, 예식 등에 참석해서 즐거운 사람들은 SJ가 아닌 다른 사람들 - "결혼식의 하객들"이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 우리는 (순전히 혼자 힘으로 씨를 뿌리고, 밀을 길러서, 어두워 들여, 빵을 굽는) '빨간 머리의 암탉 아줌마'와는 달리, 잔치에 온 손님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SJ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SJ는 늘 남에게 제공하고, 봉사하고, 보살핌을 베푸는 입장이기 때문에 은혜를 모르고 감사하는 마음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찾아내는 감각이 다른 유형의 사람보다 더 예민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는 감사나 인정을 요구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제공하고, 봉사하고, 보살피는 것은 그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의무감과, 책임과, 부담을 느끼는데, 이것이 그가 원하는 바이다. 그러한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가 쓸모 없으며, 아무 데도 속해있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된다. 제공받고, 봉사 받고, 돌보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떳떳한 욕망이 못되며, 그러한 욕망이 떠오를 때마다 얼른 지워버려서, 자기자신으로부터 감춰야만 한다.

파티에 참석하러 가는 SJ의 모습을 보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파티에 참석한 것이 틀림없건만 그는 주인을 도와 다과를 대접하거나 뒷청소나 하고 있을 때가 많다. 또 한편으로는, 파티를 개최한 것은 SP인데 결국은 손님인 SJ가 그 자신의 소망대로 접대를 맡게되고 마는 것이다. 일을 벌인 것은 SP인 것이 사실인데, 그걸 마무리하는 것이 누구인지에 주목해야 한다.


직업에 대한 SJ의 선택은 보다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는 단체에 마음이 끌리며, 단체에 관련되게 된 그는 단체를 설립하고 육성하며, 그 단체들의 계속성과 영속성을 유지한다. 가르치고, 설교를 하고, 계산을 하고, 은행업무를 보고, 사무를 보고, 약을 짓고, 복구하고, 안전을 확보하고, 보험업무를 보고, 관리하고, 판매하는 일(제공하는 일) - 이 모든 직업에는 한가지 욕망의 요소 : 즉,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이 공통적으로 깔려있음에 유의하자. SJ는 어디를 가든, 누구와 함께 있든, 무엇을 하든 간에 늘 보존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간에, 언젠가는 저축을 한다. 그와 반대되는 SP는 어떻게 해서든 간에, 언젠가는 소비를 한다. SJ는 사회의 토대이고, 주춧돌이며, 원동력이고, 안정장치이며, 우리가 그의 존재를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다.


SJ에게 있어서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은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그의 대부분의 행동과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그 한가지 예로서, SJ는 그러한 보존욕구 때문에 책임이 한계이상으로 더 늘어나도 남의 청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게 된다. SJ에게 가외의 책임을 맡아달라고 일단 부탁하기만 하면, 그는 거절을 못한다.

그는 미심쩍은 마음으로 생각할 것이다. "내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 그리고는 걱정할 것이다. "그러면 손해를 보게 될 텐데." 물론 SJ도 남들은 별로 알아주지 않는다는데 대해서 얼마간은 쓰라린 기분이 들지도 모르고, 또 심지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손해를 방지하려고 노력했던 바로 그 행위 대문에 손해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남들이 별로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SJ는 솔직히 나타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어찌되었건 그는 천성적으로 빚을 지고 있고, 의무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아무리 비축을 한다해도 미래에 있을 듯하지 않은 사건에 대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아무리 의무와 책임을 짊어진다 해도 빚지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은 또한 어떤 종류의 임원이 되는 데 대한 SJ의 동경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기업체나 사회 기관에서든 간에 일단 임원이 되면, SJ는 전통을 보존하고 영속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의 권위를 행사할 것이다. 전통을 전수한다는 것이 전형적으로 에피메테우스적인 사람의 관점에서는 중대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시적이고, 덧없으며, 방편에 불과한 것들은 단체나 지역 혹은 가족의 전통에 대해 거의 모욕으로까지 여겨진다. 비록 그러한 것들이 부도덕하거나 비합법적인 것들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의심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변화이며, 변화란 전통의 상실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SJ도 변화란 불가피하고, 필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바람직하기조차 하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만일 그것이 믿을 수 있고 올바른 것, 수용되고 승인된 것을 희생하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물리쳐야 한다. 변화는 급격한 변혁을 통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전통의 수호자인 SJ는 변혁의 적이다.


SJ에게는 맡은 바 임무가 중요하듯이 호칭을 붙이는 것도 중요한데, 왜냐하면 호칭은 소유권을 승인하고, 공식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SJ에게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장땡' 이라는 생각은 이해가 안되며, 오히려 '내가 불편하더라도 법을 지키는 것이 최상의 소유'라는 생각에 젖어있다.

불법적인 소유는 SJ가 지니고 있는 악덕의 목록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한다. SJ에게 있어서는 소유하고 소유하지 않는 것이, 주고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임에 대한 그들의 갈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요컨대, 만일 우리가 소유하고 제공하며, 양도하고 영수하는 데 관한 그의 태도의 근거를 이루는 상당히 부모답고 편협한 기준을 간파할 수 있다면 SJ를 상당히 이해하게 된 셈이다.


SJ는 선천적으로 그가 사고 있는 사회의 역사가이며, 그 사회를 위해서 역사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이다. 윌듀란트(Will Durant)는 역사가 주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자유와 평등의 상반 성이라고 하였다. 자유가 증대됨에 따라 평등은 후퇴하고, 평등이 대두됨에 따라 자유는 감소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역사의 가르침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우지 못했지만 -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도로 보장한다는 유토피아를 보라 - 불평등 (위계질서)안에 자유에로의 유일한 길이 있음을 간파하고 있는 DJ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다.

위계질서에 대한 이처럼 변함없는 지지는 SJ의 연장자에 대한 경의와 연장자는 존경받고, 존중 되야 한다는 신념에도 또한 나타나 있다. 역사가 미래에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확립하며,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체계와 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의 토대가 되어야 할 원칙들이 있다. SJ는 과거의 옹호자인 만큼 원칙의 강력한 옹호자이기도 하다. SJ들 사이에도 무엇을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가에는 무시 못할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단 원칙이라고 간주하고 나면 그것을 강력히 고수한다.


SJ가 떠맡을 수 있는 책임의 양에는 결코 한계가 없다. 끝마쳐야 할 일이나, 수행해야할 과제나,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비록 SJ는 이미 불합리할 정도로 많은 부담을 안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작은 몫을 맡고 있다고 해도, 그는 웬일인지 자기에게 그 목적이 달성되는 것을 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실제로 사람들은 SJ가 가외로 일을 맡는 것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점을 때때로 이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걸 제인(Jane)이 하겠지 뭐."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열심히 의무를 수행해도 남들이 충분히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기진맥진하게 되고, 속이 상하고, 슬프고, 심지어는 병이 나기까지 할 때가 많은 제인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큰 요구가 되는지에 대해 거의 깨닫지 못하고, 알아주지도 않는 것이다. 때때로 이러한 것은 우울이라는 모습을 띠게 되는데, SJ는 특히 이러한 상태에 빠지기가 쉽다. 심지어는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같이 뛰어난 SJ 조차도 이렇듯 쇠약해지는 상태를 경험했었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다. 만일 내 이 기분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누어준다면, 지구상에는 쾌활한 얼굴을 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 기분이 좀 나아질 수 있을지 어떨지, 나는 장담할 수가 없다.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강력히 든다."(Gillette, Mary, Paul & Hornbeck.)


아이러니컬하게도 자기가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경향 덕택에 그가 항상 그에 상응하는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꺼이 해내는 SJ의 성격을 이용하기까지 했으면서도, 그의 덕택으로 가장 많이 덕을 본 사람이 그를 외면할지도 모른다.

그의 덕을 보는 사람이, SJ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보다 실제로는 훨씬 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을 거의 깨닫지 못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적도 가끔씩 있다. 그 이유는 SJ가 짐짓 심각하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한 태도 - 그의 따뜻한 마음을 거의 드러내지 못하는 겉모습 -를 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손(Hawthorne)의 '7개의 박공이 달린 집'에 나오는 헵저버(Hepzibah)는 이러한 심각함을 잘 나타내는 인물이다.


헵저버양의 찌푸린 얼굴은 그녀 자신에게 아주 해를 끼쳐서 성미 나쁜 노처녀로서 자기의 성격을 굳히게 했다. "나는 얼마나 불쌍하도록 시무룩한 사람처럼 보일까!" 그녀는 종종 자기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였음에 틀림없으며, 마침내는 자기자신이 그렇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결코 찌푸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나면서부터 부드러웠고, 민감했으며, 늘 조그맣게 떨리거나 두근거렸다. 그녀는 이러한 모든 연약함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비록 그녀의 용모는 공교롭게도 점점 더 험악해져가고 심지어는 불쾌하게까지 되어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Nathaniel Hawthorne, '일곱 개의 박공이 달린 집', Scholastic Magazine. New York, 1965, P. 33-44.)


다른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에 대해 SJ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SJ는 사회의 규범에 깊이 몰두하고 있으며, 대개는 그러한 규범에 다라 살려고 노력하며, 또 젊은이들에게 그러한 규범들을 전수하고자 노력한다. SJ에게 있어서 그가 몸담고 일하는 체제 역시 규범을 반영한다는 점은 중요하며, 그는 사회적인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제도와 가까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13명의 여자들 속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묘사는 좋은 예이다

그런 종류의 그림들은 품위가 없었다. 메리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레이스로 된 옷을 걸친 채 축 늘어져 있는 살이 통통하게 찐 말괄량이 소녀의 모습에 불신에 찬 카톨릭 교도다운 시선을 집중시켰다.

만일 자신의 달이 저따위 넝마조각을 두르고 있다면. 오닐가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메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쉽게 멍이 드는 것만큼이나 쉽게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조금만 부딪쳐도 며칠이고 살에 자줏빛 반점이 남곤 했던 것이다. 가엾은 메리, 만일 보비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그들이 그 아이를 기르는 방식이라니! 결코 쇠고기 한 조각 먹이는 법이 없었다. 때때로 새끼양고기를 조금씩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칼로리뿐인 탄수화물 종류나 그 밖의 잡다한 것들만 주었다. 그리고 만일 그녀가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 애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을 것이다. (Tiffany Thayer, '13명의 여자들'. New York : Claude Kendall, 1932, P. 1.)


기존의 사회 규범과 제도에 대한 SJ의 헌신을 가정한다면, SJ가 다음과 같은 직업들에서 높은 빈도를 나타내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이다. 즉, 상업, 서비스업, 비서직, 일반개업의, 은행업무, 중간관리자, 회계직, 치과의, 이발업, 구식미용업, 행정사무직, 약사 - 이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기존의, 공인된 제도에 소속되는 것에 관련된 직업들이다.

교육자들-교사, 행정가, 사서-중의 많은 퍼센테이지가 SJ들이다. 그 퍼센테이지는 학군의 크기와 임용절차에 관련되기 때문에 학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학군이 클수록 관리절차가 중앙으로 집중되고, SJ가 차지하는 비중도 더 커진다. 그렇지만 어떤 학군에서든 초등 학교와 중학교 교사의 반 이상은 SJ식의 생활을 영위해가고 있다. SJ 교사가 이러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납득할 만한 일인데, 왜냐하면 학교는 다음 세대에게 그 사회의 가치와 관습을 전수하는 데 헌신적인, 참으로 안정되고 가치 있는 제도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교실에 들어서면 당신은 그 제도가 허락하는 모든 힘을 손에 넣게 된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면 그들은 그것을 하고, 무엇을 읽으라고 하면 그것을 읽는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사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일러준다. 당신은 어떤 어떤 것들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는 그러한 것들에 친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교사들은 줄곧 그런 종류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바로 그런 위치에 있었다. 아무런 흔들림 없이. (Studs Terkel, 'Working', P. 566.)


SJ들은 또한 병원에서 종사하는 직업과 같이 양육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체계화된 직업들에 마음에 끌린다. 간호사들의 대다수는 명백히 SJ들, 특히 SFJ들이다.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수용하는 제도도 SJ가 특별히 책임져야 할 영역에 해당된다.


SJ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세계에서 참으로 안전장치의 구실을 한다. 그는 하루치의 보수를 받기 위해서는 하루치의 일을 틀림없이 해내며,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SJ는 잘 발달된 전통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고, 문화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진지하게 취급하며, 이를 어기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적이다.

SJ는 사회적인 관습이나 제도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한 가차없는 태도를 취한다.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취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뉘우침과 바로잡겠다는 뜻을 내보이지 않는 한 불쾌한 얼굴로 대한다.


SJ들 자신은 적절한 일을 적절한 때에 하는 경향이 있다. 매일 매일 그들은 소속감을 갈망하며 또 그들이 근무하는 기관에 도움이 되기를 갈망한다. 어제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오늘 그냥 넘어갈 수는 결코 없다.

날이면 날마다 SJ는 자기가 정말로 소속되었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하며, 날이면 날마다 그의 의무가 가져다주는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며, 사회의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고약한 취미이다. "확고부동함", "의지할 수 있음", "안정돼 있음", "신뢰할 수 있음", "세상의 소금", "사회의 중추", "의지할 수 있는 기둥" 등과 같은 말이 SJ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는 실로 그 사회의 문화 화를 주도해 가는 사람이다.

posted by 깜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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